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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단오풍정' 재료, 표현기법, 평가, 시대적 배경, 특징, 미술사적 가치와 의의

이슈팔이 2021. 3. 15.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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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윤복 - 단오풍정 

신윤복(申潤福)이 남긴 불멸의 역작

기생의 매혹적인 자태를 표현한 <단오풍정>

단오풍정
신윤복의 '단오풍정', 19세기 초반, 종이에 먹과 채색, 28.2cm, 35.6cm, 국보 135호

 

 

 

단오풍정 작품 소개

 

제작연도 - 18세기 후기 
종류 - 수묵채색화 
기법-  자본채색
재료 - 지본담채(紙本淡彩) - 종이위에 먹과 물감을 엷게 써서 그린 그림

 

「단오풍정」은 신윤복의 그림에서도 특히 쇼킹하다. 화면의 중앙에 배치된 여인의 노랗고 붉은 강렬한 색감의 의상도 유례없이 아찔하지만, 좌하(左下)에 배치된 큰 타래머리를 하고 개울가에서 목욕하는 반라(半裸)의 네 명의 젊은 여인들은 에로티시즘의 극한이다. 그리고 바위틈으로 숨어서 넘겨다보는 승려의 대담한 모습. 지금 보아도 파격적인데 조선시대에는 어땠을 것인가? 흥분을 끌어내리고 작품에 대해 알아보자.

 

 

 

조선시대 사람들은 단오를 어떻게 즐겼을까?

 

단오는 음력 5월 5일로 모내기를 마친 사람들이 잠시마나 여흥을 즐기며 다가오는 여름을 맞이하기 위해 숨고르는 절기였다.

단오가 되면 남자들은 주로 씨름을 즐겼고, 여자들은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그네타기를 했다고 한다.

 

 

 

 

단오풍정 작품 주제, 배경

 

▶ 단오를 즐기는 여인들

▶ 단옷날 추천(그네타기)놀이를 나온 한 무리의 여인네들이 시냇가에 그네를 매고 냇물에 몸을 씻으며 즐기는 장면 묘사

 

 

 

단오풍정 작품 해석

 

▶  보퉁이를 이고 오는 여인(화면 오른쪽 하단)

1) 민저고리를 입고 짙은 청색 치마 위에 앞치마를 하고 있음 → 서민층 여인으로 보임
2) 하지만 이 여인도 당시 유행하던 가슴이 다 드러날 정도로 짧은 저고리를 입고, 크고 풍성한 얹은머리를 하고 있다. 
3) 아마도 놀러 나온 여인들의 심부름을 하는 종

 


▶ 여인들을 훔쳐보는 사람들(호기심 왕성한 어린 남성인 동자승)

 1) 작품에 재미를 더해 줌
 2) 여인의 몸을 훔쳐보려 하는 관음증적 욕망을 드러냄

 

단오풍정 작품 특징

 

※ 신윤복의 특히 가늘고 유연한 필선과 한복의 아름다운 색감 등을 최대한 살려 당시의 풍속상과 풍류 생활의 멋과 운치를 실감나게 표현 ※ 

 

▶ 조선시대의 그림에서는 좀 처럼 보기힘든 여인들의 나신을 그림 → 신윤복의 대담성과 에로틱한 정서 강조

 

▶ 대각선 구도 사용  

 : 왼쪽 물가에 있는 4명의 여인들과 오른쪽 언덕위 3명의 여인 대각선 배치 
 : 오른쪽 아래 보자기를 머리에 이고 있는 여인과 왼쪽 위 바위 뒤에 있는 동자승 마주보게 배치 
   → 대각선 구도를 사용해 공간을 나눔 

단오풍정


▶ 화면 가운데 배치한 그네를 타는 여인은 '노란 저고리'와 '붉은색 치마'로 채색

 → 색상을 강렬하게 대비 시킴으로서 보는 이들 시선 집중

 


▶ 공간 배치를 통해 음양의 조화를 절묘하게 맞춤

 → 동자승들이 숨어 있는 곳은 녹음이 무성해서 그늘진 음지
 → 여인들이 목욕하고 그네를 뛰는 곳은 햇살이 밝은 양지

 

 

 

단오풍정 시대적 배경

 

신윤복의 풍속화에는 당시 유행했던 여인들의 짧은 저고리와 가체 머리의 풍습이 잘 드러나 있다.

17세기 말 ~ 18세기 초반에 그려진 윤두서나 조영석의 풍속화에서 허리춤까지 내려왔던 저고리의 길이는 
18세기 후반에 그려진 김홍도의 풍속화에서 그 길이가 짧아졌다.

영조 때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이 쓴 『성호사설』에도 이러한 저고리의 유행이 다음과 같이 기록

지금 부녀자의 의복은 짧은 적삼에 소매가 좁은데 어느 때부터 생긴 지는 알지 못하며 귀천이 통용하니 해괴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습속에 젖어 예사로 알고 있다.

또 여름에 입는 홑적삼은 아래를 줄이고 위로 걷어 올려 치마 말기를 가리지 못하니 더욱 해괴한 일이다. 이는 의복의 요물이니, 마땅히 금지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에 짧은 저고리는 더욱더 유행

19세기 초반에 그려진 신윤복의 풍속화를 보면, 저고리의 소매통은 더욱 좁아지고, 길이는 젖가슴 부위까지 짧아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가체의 유행과 이로 인한 사치는 조선 후기 들어 사회 문제로 대두될 정도였다. 기녀뿐만 아니라 양반집 부녀자들에게도 가체는 널리 퍼졌고, 그 사치의 정도가 날로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이덕무(1741~1793)는 『청장관전서』에서 여인들의 가체 사치풍습을 비판하면서, 가체 때문에 목이 부러져 죽은 여인의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지금 부인들은 비록 마지못해 시속을 따른다 하더라도 사치를 숭상해서는 안 된다. 부귀한 집에서는 머리치장에 드는 돈이 무려 7~8만에 이른다.

다리를 널찍하게 서리고 비스듬히 빙빙 돌려서 마치 말이 떨어지는 형상을 만들고 거기다가 웅황판(雄黃版)·법랑잠(法琅簪)·진주수(眞珠繻)로 꾸며서 그 무게를 거의 지탱할 수 없게 한다.

그런데도 그 가장은 그것을 금하지 않으므로 부녀들은 더욱 사치스럽게 하여 행여 더 크게 하지 못할까 염려한다.

요즘 어느 한 부자집 며느리가 나이 13세에 다리를 얼마나 높고 무겁게 하였던지, 시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자 갑자기 일어서다가 다리에 눌려서 목뼈가 부러졌다. 사치가 능히 사람을 죽였으니, 아, 슬프도다!

 

가체가 사회문제 됨 → 영조는 ‘부녀발제개혁’을 내려 가체를 금하고 족두리로 이를 대신하게 하였는데
점차 족두리에 하는 장식이 과해지고 비용이 많이 듦 → 이 역시 또 다른 사회문제가 되었다. 

이에 나라에서는 정조 12년(1788)에 다시 가체 금지령을 내리고 『가체신금사목』을 한문과 한글로 제작하여 전국 관아에 배포했다.
그 내용을 보면, 혼인 시에 어여머리나 큰머리를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일체의 얹은머리를 금지하고, 
진주당기나 금옥주패 등 수식에 사용하는 각종 장식도 금지하였으며, 족두리의 장식물도 일체 금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금지 정책으로도 이미 널리 퍼진 가체의 유행을 막지 못했는지 
19세기 초 신윤복의 풍속화에 그려진 여인들은 이전 시기보다 훨씬 커지고, 풍성하게 치장한 머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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